[취재파일] 식약처만 몰랐던(?) 빅데이터의 위력
[CMN 박일우 기자] 식약처가 체면을 구겼다. 어떻게 보면 한 식구에게 당한 꼴이라 더 민망하다.
며칠전 서울행정법원은 대한화장품협회와 화장품업체 18곳이 식약처장을 상대로 낸 정보공개결정 취소소송에서 “화장품별 원료·성분 데이터를 김모씨에게 공개하도록 한 처분을 취소하라”고 원고승소 판결했다.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지난해 9월 민원인 김씨가 화장품 수출의 행정적 어려움을 해소하고 동남아시아 소비자에게 한국 화장품의 안전성을 알리겠다며 식약처에 화장품 원료 및 성분 데이터 목록을 전자파일로 공개해달라고 청구했다.
당시 식약처는 처음에는 이 청구를 기각했으나, 민원인이 재심을 청구하자 정보심사공개위원회를 열어 11월 이를 공개키로 결정했다. 이미 개별 화장품마다 포장지 등에 전성분이 표시돼 있어 비공개 대상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게 식약처 판단의 근거였다.
이 소식에 업계는 당연히 반발했다. 식약처가 공개키로 한 정보가 무려 18만여개의 화장품 원료·성분 목록을 엑셀파일로 정리한 ‘빅데이터’이기 때문이다. 이는 활용 여부에 따라 각사의 영업비밀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제품 개발·생산 비법을 넘겨다볼 수 있는 단초가 될 가능성이 다분하다.
실제 법원도 판결문에서 김씨가 공개를 청구한 정보는 약 18만여 품목에 달하는 화장품 품목별 원료 등을 내용으로 하는 엑셀파일 형태의 매우 방대한 양의 자료라며 이를 분석하면 각 회사가 노력과 자금을 투자해 얻은 영업상 비밀이 침해될 소지가 크다고 봤다. 특히 18만여 개별 화장품 포장에 기재·표시되는 전성분 정보를 모은 엑셀파일은 빅데이터로서 완전히 새로운 가치를 지니는 별개의 정보로 봐야 한다며 업계의 손을 들어줬다.
아직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지만, 일단락된 상황에서 몇 가지 의문이 남는다. 우선 식약처는 왜 줄곧 산업 발전을 위해 손발을 맞춰온 화장품협회마저 반기를 들 만큼 민감한, 기업의 핵심적 영업비밀이 담긴 정보를 공개하려고 했을까? 삼척동자도 다 아는 빅데이터의 위력을 몰랐서였을까? 아니면 국민의 알권리를 최대한 보장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결단이었을까?
사실이 어느 쪽이었든, 법원의 판결처럼 패착이다. 개별 정보를 대량으로 모아놓은 것이 빅데이터다. 비단 화장품이 아니더라도 빅데이터를 가지면 그 쓰임새가 무궁무진하다는 건 상식이다. 국민의 알권리 보장을 위해서라는 것도 수긍하기 어렵다. ‘정보공개법’을 통해 국민들이 원하는 건 별무소용인 무제한의 정보 제공이 아니라 보다 투명한 행정을 위한, 즉 밀실 짬짜미를 못하도록 하는데 있기 때문이다.